택시를 타기 전 박은 내게 한달 동안이나 피아노를 만지지도 못했다는 말을 털어놓았었다. 그런 말을 할 때 그의 얼굴이 하도 어두워 보여서 하마터먼 나는 왜요? 하고 물을 뻔했었다.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하고 물을 뻔도 했다. 그러나 나를 자제케 한 것은 나 역시 몇달동안 한줄의 글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.

하지만 나는 그래도 아직은 컴퓨터 위에서 피아노 치듯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. 쓰고 또 지우고 또 지우고, 그리고 마지막에 다 지워진 컴퓨터의 검은 화면에 명멸하는 커서만 바라보는 일 ...... 마치 너는 할 수 있어, 없어, 있어, 없어 ...... 하듯이 명멸하는 그 커서 ...... 그런데 그는 피아노엔 손도 안 댔단다. 그가 치는 피아노 소리는 나처럼 Delete 라는 단추를 누르지 않아도 허공 속으로 지워져가는 것이었는데 그는 왜 손도 대지 않았을까.

1994년, 공지영 소설집 '인간에 대한 예의' 中

by 정길 | 2009/09/16 09:28 | 트랙백 | 덧글(0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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